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 인민해방군/역사 (문단 편집) == [[양탄일성]] 추진과 [[문화대혁명]] == 다만 중국 역사상 최대의 병크인 [[문화대혁명]] 기간에 군의 발전 역시도 정체된다. 아울러 [[소련]]과 관계악화로 인한 [[중국-소련 국경분쟁]]에서 전술, 전략적 취약점을 드러내며 "인민의 바다" 전략의 한계성[* 인민의 바다 전략은 적을 끌어들여 공간을 주고 시간을 벌어 전력을 모으는(또한 [[청야전술]]이 높은 확률로 동반되는) 극히 방어적이고 [[소모전]]적인 전략이다. 그런데 소련군의 전략은 그런 상황을 회피하기 위한 [[기동전]]이었다. 그리고 구 소련은 만약 분쟁이 확대될 시 '''[[핵전쟁]]'''을 계획한 상태였다. 당시 중국은 재래식 전력이고 핵 전력이고 간에 전혀 소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.] 또한 드러나게 된다. 그리고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에는 도리어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습격하자, 이에 대한 보복으로 베트남을 침공해 [[중월전쟁]]을 일으켜 베트남과의 어중간한 전쟁을 치르다가 깨지고 물러난다. 베트남은 주력이 다른 곳(캄보디아)에 파견나간 상태였는데도 중국군은 국경지대를 넘지 못했다. 결국 베트남에게 고전한 중국군은 결국 포기하고 전쟁을 중단, 다시 돌아왔다. 그 당시에는 베트남이 '''[[베트남 독립 전쟁|프랑스와도]], [[베트남전|미국과도]] 싸워 이긴 나라''' 타이틀을 갖고 있었던 상황이기도 했고, 중국군은 더욱 저평가받게 된다. 한편 중국공산당은 이미 문화대혁명 이전부터 미국, 소련에 비해서 현격하게 뒤쳐진 재래식 군사력과 경제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전략무기 개발에 몰두하였다. 1955년 [[첸쉐썬]] 박사와 100여명에 이르는 제자들이 귀국하면서 시작된 핵무기 개발와 장거리로켓/미사일 개발은 문화대혁명 와중에도 꾸준히 진행되어 1962년 핵실험에 성공하고 67년에는 수소폭탄을 보유하게 되었다. 1970년에는 독자적인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하였다. 자세한 내용은 [[양탄일성]], 로켓 [[창정]] 문서로. 1960년대 중국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는 것을 첩보로 인지한 미국은 내륙에 있는 중국의 핵플랜트를 폭격하려고도 했으나, 베트남에서 발목을 잡히고 있는데다가 자칫 확전이 될 수도 있는 부담이 있어서 포기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